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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키스공간/일상기록

블랙미러 7시즌 율로지를 보고

지난 1월에 쓰다 만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임시 저장글을 열었다.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 7시즌을 정주행했다.
그중에서도 보는 내내 펑펑 울었던 에피소드, 율로지.

이야기는 미래의 장례 시스템을 다룬다.
죽은 사람의 지인들에게서 기억을 수집하고, 사진이나 사물 같은 트리거를 통해 흐릿한 과거를 재현한다.
마치 그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듯, 율로지 시스템으로 기억을 시뮬레이션한다.

나에게도 그런 트리거가 있다.

 

※ 아래는 강한 스포일러 포함

 

에피소드는 흐릿해진 옛 연인의 기억을, 율로지 시스템을 통해 하나씩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다.

처음엔 그녀와 관련된 주변 사진들만 나온다.
같은 공간, 같은 날, 같은 장면인데 정작 그녀의 얼굴은 없다.
기억은 배경만 맴돌고, 중심은 비어 있다.

그러다 그는 다른 사진통을 꺼낸다.

그 안에는 그녀의 얼굴이 모두 도려내진 사진들.
억지로 잘려나간 자리만 하얗게 남아 있다.
그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어떻게든 기억해내려 한다.

지워버리려 했던 흔적을 다시 붙잡으려는 모순.
그 공허한 얼굴 자리가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그녀를 증명한다.

그 장면을 보는 내내,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보다
기억하려 애쓰는 비참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중반부에는 율로지를 돕는 NPC가 혹시 옛 연인 아닐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녀의 딸이라는 반전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진실.
깊은 오해, 그녀의 임신, 분노로 인해 놓쳐버린 편지.
그 과정을 따라가며 감정이 무너졌다.

마지막 바이올린 장면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초반에 잠깐 나온 이 장면이 후반의 절정에서 다시 등장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꺼내면 됐을 기억이었다.
모든 오해가 자신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야 그는 그것을 재생한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가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를 틀고,
사진을 들며 말한다.

“만나러 가요.”

음악과 사진을 매개로, 그는 마침내 그녀를 완전히 기억해낸다.


나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다.

트리거는 단순하다.
한겨울, 눈 덮인 새하얀 설경과 얼어붙은 빙판길.

그런 유사한 풍경을 보는 순간, 나는 어김없이 그때로 돌아간다.

파란색, 노란색 트래킹화.
빨간 털모자.
이터널 선샤인.
네일로 기차 여행.

벌써 13년이나 된 옛 이야기지만, 이상할 만큼 선명하다.
그때만큼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었던 적은 없었다.

매년 그리움에 잠겨 괴롭기도 했지만,
그 기억은 내가 오래도록 서 있을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율로지는 오랜 오해에 대한 후회를 깊게 그려낸다.
이제는 전할 수 없는 사랑과 사과.
그래서 더 덧없고, 더 아프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꺼내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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